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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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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7
아롱이 입원
시리즈
부제
본문 아롱이 입원함 펼쳐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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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1
우물속으로
시리즈
부제 20260811의 일기
본문 울증삽화에 들어섰기에 주말마다 약속을 잡고 있다. 언뜻 모순된 문장 같지만 난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 날엔 일정이 있으니 이 때까지는 살아야겠다, 하며 며칠 단위로 살아갈 이유를 만들고 다짐을 한다. 막상 나가면 즐겁겠지만 안 나가도 그만인 모호한 약속들. 허무하다. 시커멓고 깊은 공허를 가리려 주위를 요란하고 화려하게 치장해봐도 그 대비 때문에 공허가 더 돋보인다. 부질없다. 예전엔 내가 이 구멍을 메울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내 내면 세계를 넓혀서 구멍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을 줄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구멍은 거기에 있어도 내가 구멍만을 들여다 보는 날들은 적어질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단지 요즘은 그 구멍만을 들여다보는 날들의 한 가운데에 있을 뿐이다. 나는 아마 살고 싶은데 구멍을 바라보고 있을때는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잊게 되는 것 같다. 그 구멍은 가족들의 죽음으로 뚫린 거니까. 그 안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그 안쪽을 바라보면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내 몫의 죽음도 그 안에 있을까. 그 공허는, 예전엔 바닥에 구멍을 파고 어설프게 판자 뚜껑을 덮어 누름돌을 얹어 둔 구덩이였다. 뜨거운 감정이 요동쳐 쏟아 오를 것 같아 불안정했다. 실제로 끓어오르는 감정이 널빤지 사이로 새어나와 주체할수 없는 울음을 쏟아내곤 했었는데 지금은 구멍의 형태가 변해서 예전처럼 잘 울지는 않는다. 그 구멍은 지금 낮은 풀이 듬성하게 자란 초원의 마른 우물이 되었다. 물기 없는 바람과 짙은 풀내음이 가까운 그런 우물. 볕을 가리기 위한 작은 지붕이 있는 우물은 정말 깊이 뚫려있는데 좁아서, 떨어질 것 같지는 않고 몸이 맞을 것 같아 아늑해보여서 무섭진 않다. 앉아서 종아리정도는 넣어도 될 것 같다. 우물에 기대 기둥밑에서 시원하고 그늘진데서 웅크려 낮잠잘 수도 있을 것 같고. 편안하고 익숙한 공간이 되었는데 계속 우물에 걸터앉아 멍하니 그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바닥이 안 보일정도로 까마득하다. 공허는 여전히 공허다. 깊다. 어둡다. 더 이상 요동치지는 않은데, 내가 발을 들이면 여전히 날 잡아먹으려는 감정이 웅크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난 그 우물에 들어가고 싶다. 포근해보인다. 그 공허가, 無가 됨으로써 얻는 영원한 안식이. 펼쳐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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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28
生きて
시리즈
부제 20260728의 일기
본문 https://youtu.be/EEMwA8KZAqg?si=SvLNKUycYm4iGAMU 아이묭의 노래 生きていたんだよな를 좋아한다. 우울할 때 듣기 좋다. 내레이션에서 갑자기 노래로 넘어가는 파트도 좋아하고, 마지막 가사도 좋아한다. (最後のサヨナラは他の誰でもなく/自分に叫んだんだろう/サヨナラ サヨナラ) 가장 좋아하는 건 반복되는 중심부의 가사다. 生きて生きて生きて生きて生きて / 生きて生きて生きていたんだよな 반복되는 生きて만 떼어서 본다면 살아줘, 라고 해석할 수가 있어서 살아줘, 살아줘, 살아줘, 살아줘... 그렇게 들려서. 위안이 된다. 펼쳐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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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7.23
'귀찮'은 일기
시리즈
부제 20260723의 일기
본문 '귀찮다'는 말은 뭉뚱그린 말이다. 옷을 벗어서 빨래통에 넣거나 옷장에 걸어두거나, 건조대에 걸린 빨랫감을 걷어 개서 정리하고, 팔을 뻗어 쓰레기통에 빈 약봉지를 넣는 것, 자리끼 물컵을 매일 씻어 교체하는 일 등 일상을 유지하는 일에 쓸 여력이 없을 때를 모두 합쳐 세 글자로 얼버무려 나는 '귀찮다'고 말한다. 5월은 평온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그 상태가 지속되길 바랄 정도로 감정도 에너지도 '제정신인' 사람 같았다. 6월은 바라 마지 않았던 경조증이 찾아왔다. 바이브 코딩에 몰입하고, 방 한구석에 티룸을 꾸미고, 돈을 펑펑 쓰고, 노래를 부르고, 뭐든지 신이 났다. 그리고 7월엔 뭐든지 '귀찮아'졌다. 6월에 경조증을 조금 즐기다가 잠을 못 자게 되자 병원에 찾아가 증상을 말씀드리고 기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주치의 선생님은 내 에너지보다는 기분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데에 신경쓰신다. 하긴 죽으려던 환자였으니 에너지보다는 기분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기분은 일정하다. 6월에도 지금도. 에너지만 차이가 날 뿐이다. 에너지라는 게 내가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워서 웹다이어리엔 '기분 ·에너지'로 합쳐서 표시하고는 있지만, 분명히 다르긴 하다는 게 느껴진다. 기력이 없다, 기력이. 氣力. 기분이 안 좋으면 냅다 30분을 달리거나 정 안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칼로 피부를 그으면 빠르게 해결할 수 있지만, 氣를 다스리는 법은 스스로 터득하지 못했다. 내가 도사냐? 기분은 일정한데 기력이 들쑥날쑥하다는 건 위화감이 들 정도로 정말 이상한 감각이다. 마치 흔들리는 놀이기구에 타고 있는데, 목 아래로는 놀이기구와 함께 흔들리고 있지만 머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 같다. 이게... 맞나? 이 머리가 내 머리가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이상하다. 내 거 맞아? 그치만? 위화감이 들어도 하나라도 멀쩡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이 위화감은 치워둔다. 여기에 몰두하고 싶지는 않다. 5~7월의 타임라인을 돌이켜보니 또 다시 정신병이 도진다(당사자성 발언ㅋㅋ). 내가 이 사이클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걸 늘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가끔식 체감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 때는 삶을 관조할 수 없게 된다. 메타인지가 안 된다고. 여생을 늘 이렇게 살아가게 되겠구나! 평안한 척 하다가 웃고 울고 하겠구나! 지겹다! 귀찮다! 살기 싫다! 적극적으로 인생을 끝낼 생각은 없지만 역시 인생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까지 습관적으로 생각을 늘어놓게 된다. 몇 주 전 나는 내가 죽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죽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게, 내 어휘의 한계로 인해 표현할 법을 몰라서 유사한 단어를 찾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날은 여름의 초입이었고, 시골의 한 카페의 마당의 잔디밭 구석의 나무그늘 아래서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죽고 싶다는 말이 떠올랐다. 왜냐면 너무 평온했거든. 그 잔디밭도, 나무그늘도, 여름냄새도, 예전의 시골집이 떠올라서 그리운 마음도 들고. 그래서 죽고 싶었다. 그 얘기를 챗 GPT한테 설명하다보니 -이런 무거운 얘기를 현실친구한테 하기엔 좀 감정쓰레기통으로 쓰는 것 같아서-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내게 있어 죽음이라는 개념이, (無가 됨으로서)절대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라서, 그저 평온을 갈구하는 마음을 '죽고 싶다'라고 표현해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난 그 뒤로 내가 이제까지 죽고 싶다고 생각해 왔던 건 사실 진짜로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평온하고 싶었던 거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응 근데 다시 울증 오니까 아니야. 역시 인생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귀찮아. 시간이 너무 안 간다. 그냥 퇴근하고 잠만 잤으면 좋겠다. 다 귀찮으니까. 잠으로 도피하고 싶다. 펼쳐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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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3
5월의 코트
시리즈
부제 20260513의 일기
본문 사람의 장기기억은 이례적인 일을 우선적으로 저장한다고 한다. 평이한 일상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면 그게 생존에 어떻게 작동하는 요소가 될지 분석을 하고 되새기기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내 서른세 번째 생일에 대전이라는 지역변수를 만들어 작은 돌발성으로 오늘을 기억의 흐름속에 도드라지는 하루로 만들려했다. 그러나 변수는 지역이 아닌 인물이었다. 이모와 통화를 하다가 무심코 내가 이모가 사는 지역에 와있다는 말을 했고, 이모는 곧장 나를 댁으로 소환했다. 혼자서 여느때와 같은 휴일 루틴을 지역만 바꿔서 보내자고 다짐하고 대전에 왔건만, 전혀 다른 일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모와 백화점에서 식사를 하고, 모든것이 과장스런 고급 미용실에서 마사지를 받으며 머리를 다듬고, 카페에서 일상을 나누었다. 비록 이태리식 오믈렛을 얹은 오므라이스와 지역 명물 푸딩과 내부에 폭포가 있는 대형 카페는 내 핸드폰 메모장 속 일정계획 안에 건조한 텍스트의 나열로만 박제되었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런 하루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모는 돌아가신 엄마와 닮아서. 이모와 손을 잡고 백화점과 거리를 거닐고 단 둘이 카페에 가는 건 몇 년전 엄마와 보내던 일상같아서 그리움과 따스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엄마가 돌아가시고나서 백화점에 잘 안 가게 되었다. 돈도 직업도 없는 스물 일곱은 기껏해야 아웃렛이나 영화관이 있을법한 복합몰에 가는 거다. 난 돈이 없었을뿐인데 백화점이 내게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 뒤로 돈을 벌게 되었어도 백화점에 가서 비싼 옷을 사본적이 없다. 같은 브랜드의 옷을 사더라도 어쩐지 백화점 내에 입점되지 않은 곳에 가게 된다. 나는 엄마를 닮아 말랐었다. 키는 내가 조금 더 컸지만 사이즈는 같았다. 그래서 나이에 상관없이 입을 수 있는 옷들은 함께 입었다. 내 옷장에 남아 있는 코트들도 그런 옷들이다. 장식 없는 클래식하고 기본적인 디자인이라 엄마와 내가 같이 입었던 옷들. 지금은 살이 쪄 사이즈가 맞지 않아 못 입게 되었지만 그 옷들을 떠나보낼 수가 없더라. 그 코트들 말고 남겨둔 옷 중에서 모피코트가 한 벌 있다. 엄청나게 세련되고 멋들어진 옷이라 마치 드라마속 재벌집 사모님들이 입는, 단아하고 절제된 고급스러운 무게감을 은은히 내뿜는다. 그런데 그건 너무 '어른' 옷이라, 내가 입으면 어린 애가 엄마 옷을 훔쳐입은 티가 역력하다. 잔주름하나 없는 내가 그 옷이 어울리려면 20년은 더 성숙해야 태가 날듯하다. 엄마가 떠나신 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엄마한테 가까워지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영영 잃었다고 생각한 일상을 닮은 사람을 통해 비슷한 방식으로나마 맛보았다. 달콤하고 다정하지만 동시에 슬펐다. 그래서 오늘은 오래도록 기억되겠지. 엄마가 돌아가신 지 7년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잊고있던 상실을 마주하면, 부재의 존재가 너무나 선명해진다. 내 세상이 넓어져서, 내 마음이 밀도있게 차올라서. 한구석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뚫린 구멍은, 평소에는 눈길이 가지않지만 한번 시선을 빼앗기면 한동안 계속 눈길이 간다. 아마 당분간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울게 될 것 같다. 펼쳐보기 ▾